순간 속의 영원을 마주하다(순례자를 위한 음악선물 '임동혁 피아니스트) 공연 후기

관리자

2025-07-2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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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속의 영원을 마주하다(순례자를 위한 음악선물 '임동혁 피아니스트) 공연 후기
— 남양성모성지에서 열린 임동혁 피아노 독주회를 다녀와서 —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저녁빛 속에서 고요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마리오보타가 설계한 절제된 곡선과 빛, 줄리아노 반지가 조각한 예수상의 깊은 눈길,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성화 앞에 자리한 관객들의 숨결지, 모든 것이 이미 하나의 장엄한 무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연은 슈만의 어린이 정경 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월의 그림자와 잃어버린 순수함이 함께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그 곡을 연주하는 임동혁 님의 모습에서는 문득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가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긴 고행과 세월을 지나 오늘 이 무대에 선 연주자의 삶이 그 한 구절 속에 비춰 보였습니다.
이어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는 더 깊은 고독과 사색을 불러 왔습니다. 1 악장의 고요함은 단순한 달빛의 정취가 아니라, 어릴 적 학대를 견디다 어느 날 밤길을 도망쳐 호수에 이르러 물에 몸을 담그고, 그곳에서 밤 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던 소년의 마음 같았습니다. 마치 영화 불멸의 연인 의 마지막 장면처럼, 소년은 어느덧 별빛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됩니다.

그 장면은 자연스레 예수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고행과 최후의 만찬을 거쳐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 그리고 남양성모성지를 일군 이상각 신부님, 이 대성당을 설계한 마리오 보타, 예수상과 성화를 남긴 줄리아노 반지, 이 모든 분들이 마치 밤 하늘의 별처럼 영생의 자리에서 빛나는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세 번째 곡으로 연주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부드러운 애도의 숨결로 성당의 공기를 흔들었고, 네 번째 곡인 쇼팽의 발라드 1번 은 인간의 심연과 고통, 그리고 그 너머의 희망까지 담아내는 깊은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라벨의 라 발스(La Valse)는 서정과 광기가 교차하며, 삶과 세계의 허무를 웅장하게 마주하는 결말이었습니다.

2 시간이 넘는 연주 동안, 악보 한 장 없이 이어진 음악은 관객들을 완전히 몰입하게 했습니다. 연주 중간중간 들려오는 미세한 콧소리와 험밍조차 곡과 완전히 하나가 된 연주자의 숨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본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섯 곡의 앵콜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여운 속에 한동안 더 머물렀습니다.
임동혁님은 7 세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하노버 음악원과 줄리아드 음대를 거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상을 거부하고 긴 침묵을 선택하는 등, 화려한 경력 뒤에는 깊은 고뇌와 자신만의 음악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 삶의 궤적과 진솔한 고백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습니다.
공연을 마친 뒤, 제 아내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동혁 씨는… 천주교 신자인 것 같아요. 자신이 닦아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듯 연주하는 것같았어요.”
그날의 연주는 단순한 피아노 리사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불멸의 연인 의 마지막 장면처럼,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마주하는 시간이었고, 밤하늘의 별처럼 영생으로 이어지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주회 중간, 신부님께서 짧게 인사말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음악입니다. 앞으로도 이 대성당에 하느님의 음악이 자주 채워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연주의 여운과 겹쳐 제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후 앵콜곡으로 연주된 6 곡이 무엇인지 모르던 저에게, 신부님께서 넌지시 쇼팽의 발라드 2 번, 3 번, 4 번, 피아노 소나타 2 번 Op.35, 그리고 쇼팽 전주곡 Op.28-24 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누군가 후기에서 적은 것처럼, “음악회 정해진 다섯 곡이 끝난 뒤에야 본 공연이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이 절묘하게 맞았습니다. 신동과 천재가 들려주는 음악도 아름답지만, 신동과 천재, 치열한 정진, 그리고 수많은 시련을 겪은 후 통찰과 성숙이 스며든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음악은, 마치 순례자를 위한 고백처럼 다가왔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대성당을 나서며 마음 한켠이 더 깊어졌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저는 아들 윤식과 함께 남양성모성지 성물판매점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성모상과 성모자상을 모셔와, 병원 EIE 센터의 작은 숲에 지난번 전등사에서 모셔온 지장보살상, 그리고 오래전 인도의 전임의가 선물로 주고 간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하얀 코끼리상과 함께 모시기로 했습니다. 서로 다른 길에서 건너온 성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병원과 그 숲을 찾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평안을 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날 밤, 연주와 기도, 그리고 모셔온 작은 성상들이 제 마음속에 한 줄기의 빛처럼 겹쳐졌습니다. 서로 다른 이름과 길을 걸어온 존재들이 결국 같은 하늘 아래 하나의 별빛으로 모여드는 듯했습니다. 그 빛이 언젠가 우리 모두를 영원의자리로 이끌어주리라는 조용한 믿음이, 남양의 바람처럼 제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습니다.
2025.7.19
觀我

김태균님은 무릎 관절 질환 치료 분야에서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TK정형외과의 대표원장이며, 남양성모성지(엔드리스) 문화사목을 위해 함께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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